오늘날의 교회
7.1 ‘교회’라는 단어는 무슨 뜻인가요?
신약성서는 원래 그리스어로 쓰여졌습니다. 그럼 교회를 지칭하는 그리스어는 무엇이었을까요? ‘에클레시아 (ecclesia)’라는 그리스어의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이 단어의 뜻은 바로 ‘밖으로 불려진 사람들 (called out)’이란 뜻이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교회란, 이 세상에서 불려내어졌으며, 따라서 이제는 이 세상과 아무런 인연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그리스도’에게 속한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7.2 그러면 교회란 무엇인가요?
이 세상은 교회를 다양하게 정의하지만, 하나님이 아는 교회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은 교회란 믿는자들로 구성되어진다고 말합니다. 이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게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에배소서 1:13). 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의 ‘몸’에 더해진 것으로, 어느 특정 집단 (특정 교단 혹은 특정 교회 등)에 가입하는 것이 아닌, 바로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더해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7; 고린도 전서 12:13; 에베소서 1:23 참조)

7.3 교회의 시작은 언제인가요?
교회의 시작은 언제인가요? 교회의 시작은 오순절 (Pentecost) 날이며, 이는 주님이 부활한 지 50일 이후 입니다 (사도행전 2장 참조).
그 이전에는 왜 교회가 시작될 수 없었나요?
그리스도가 먼저 죽고 영광받기 전에는, 교회가 시작 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성령이 오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먼저 죽고 영광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7:37-39 참조).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교회를 언급하시는 부문을 보면, 미래시제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18절).
혹시 그 이후에 생기지는 않았을 까요?
‘오순절 (Pentecost)날 성령을 받았던 이들은 모두 유대인이 였기 때문에, 이후에 비유대인 교인들이 나타난 후에야 (즉, 사도행전 10장, 11장 즈음에야) 교회가 생겼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2장 마지막 절을 보면,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그 교회에 날마다 더해 주시더라 (한글킹제임스)’ 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시점에 교회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1] 고대의 성경 사본들을 보면, 사도행전 2장 마지막 절에 ‘교회에’라는 단어가 빠져있는 사본들이 몇몇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가 이시점에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조금 뒤 사도행전 5장 11절에 ‘교회’가 다시 언급되며, 또한 주님께서 하늘로 승천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의 침례 (즉, 교회의 시작 –고린도전서 12:13) 가 ‘여러날 남지았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7.4 구약에도 교회가 언급되나요?
성경에서 ‘지나간 다른 세데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려주지 아니하셨는데 (에베소서 3장 5절 –새번역)’ 라고 언급하듯이, 구약시대에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진리는 아직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구약성서에 교회가 은유나 암시를 통하여 나타나지만 (예: 창세기 24장의 리브가), 신약성서의 ‘빛’이 없이는 이러한 은유/암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7.5 현재의 교회 구성원들은 누구인가요?
구원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 모두는 이미 교회의 구성원들이며 (에베소서 1:13), 따라서 하나의 ‘몸’으로 이미 연합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3). 이 진리는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유대인이건 비유대인이건, 모두 적용됩니다.
7.6 교회의 구성원으로 가입은 어떻게 하나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당신은 ‘이미’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기 때문에 다른 가입절차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믿는자는 이미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된 것이며 (고린도전서 12:12-13),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교회 (에베소서 1:22-23; 디모데전서 3:15)’, 즉 하나님 말씀이 가리키는 교회인 것입니다.

7.7 신약은 왜 교회를 다른 사물에 빚대어 설명하나요?
비행기를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어떻게 비행기를 설명해야 할까요? 아마도 사진을 보여주며, ‘비행기는 큰 새와 비슷하게 생겼고, 몸은 튼튼한 강철로 만들어 졌으며, 물 대신 휘발류를 마시고, 나무가지 대신 활주로에 앉으며, 기타 등등’과 같이 설명하겠지요? 이렇게 우리가 이미 알고있는 사물에 빚대어 설명한다면, 비행기가 무엇인지 어느정도는 전달이 되겠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몸, 신부, 집 등’에 비유하여, 교회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7.8a 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이 ‘교회를 몸에 비유’하실때 (고린도전서 12장 참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 우리의 몸이 각기 다른 부분들으로 이루어진 처럼, 교회를 구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서로 다르며 또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합니다.
- 각기 다른 부분들이 모여 ‘하나’의 몸을 이루듯이, 교회도 통합된 하나의 개체입니다.
-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몸된 교회의 머리가 바로 그리스도 당신이라는 진리입니다 (질문 3.10 참조)

7.8b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일반적으로 집안의 모든 물건들은 집 주인의 뜻에 따라 배열/정돈되겠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도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적용됩니다:
- 주인인 하나님의 질서가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3:15)
-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며, 하나님께 영광이 바쳐집니다 (시편 26:8 – 여기서 ‘존경/존의’는 다비 번역본에서는 ‘영광 (glory)’으로 번역되고, 타 번역본에서는 보통 ‘존경/존의 (honour)’로 번역됨)
- 모든 것들은 거룩해야합니다 (시편 93:5)
시편에서 인용된 위의 구절들은 물론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집에 적용이 되고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영광’과 ‘거룩’이 ‘하나님의 집’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2:19-22).

7.8c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신부란 ‘애정, 그리고 거리감 없이 아주 친밀하고 독보적인 관계’와 연관이 있습니다 (창세게 2:24). 신부에대한 교회의 비유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에베소서 5:25-32). 교회가 애정을 가져야할 대상은 다른 곳으로 분산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집중되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1:2). 그리고 당신이 신부라면, 아주 커다란 열망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신랑이 와주기를 바라는 열망!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장 17, 20절).

7.9 그렇다면 교회가 어떻게 특정 지역에 있을 수 있나요?
하나님의 교회는 전 세계/우주적인 교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고린도전서 12:27), 또한 특정 지역의 교회를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에베소서 1:22-23). 이 두가지 측면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지구이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이 특정지역의 지역 교회들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지역 혹은 어떤 동네의 교회를 지칭할때,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그 지역/동네의 모든 크리스챤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질문 7.2 참조). 신약시대를 한번 생각해볼까요? 신약시대 때, 우리가 특정 동네를 방문한다면, 그 지역의 교회를 한눈에 알아보기가 오늘날 보다 훨씬 더 수월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한 지역의 크리스챤인들은 대게 한 장소에서 모였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챤들의 수가 너무 많은경우, 몇 몇 다른 장소에서 모이기도 했지만, 이 모든 크리스챤들 서로 서로가 교제를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신약시대 때, 크리스챤인들은 사회에서 다소 격리된 집단이였기 때문에, 일반인들 (불신자들)이 크리스챤인들과 함께 모이기를 분명히 꺼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재 시대로 다시 돌아와 볼까요? 오늘날은 이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이름을 붙인 (예: ____교회) 단체들 이나 종파들을 만들었으며, 그 자신들의 단체에 가입하여 구성원이 되는 것이하는 것이 마치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구성원’이 된는 것으로 왜곡하는 경우가 파다해졌습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말씀의 잣대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특정 지역/동네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찾아볼 수 있으며, 또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로써 증거해야할까요? 바로, 하나님 말씀에 대로 모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모임활동을 하는 것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이를 위해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크리스챤들과 모여야 하겠지요, 하지만 모이는 이들 중에는 ‘하나님의 교회’에 속하지 않은 이들이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7.10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은 무엇인가요?
사실, 크리스챤이라면 행하는 모든 일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해야합니다 (골로새서 3:17). 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 (마태복음 18:20) 는 것에 입각해서 말하자면, 우리 주님이 ‘모임’의 중심에 있어야하며, 주님이 모임을 이끌어야하며, 주님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주님의 ‘권위’를 인지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7.11 그렇다면 교회 모임이란 무엇이며, 모임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주어진 지역 내의 ‘교회 전체’ (질문 7.9의 ‘전 세계/ 우주적 교회’ 참조) 가 함께 모이는 모임으로 (고린도전서 14:23), 중요한 것은 모일 때 ‘교회 전체’의 일 부분이 아닌, ‘교회 전체’로써 모여진다 (고린도전서 11:18)는 것 입니다 (물론 앞에서 ‘교회 전체가 함께 모인다’이라고 했지만, 개인 사정/여건 때문에 모이지 못하는 크리스챤도 있겠지요). 신약 성경에서는 교회 모임의 이유로 다음의 3가지를 언급합니다:
7.12 그렇다면, 교회 모임은 누구에 의해서 운영 및 관리되어야 하나요? 특정 목사나 장로들의 몫인가요?
크리스챤들이 ‘그의 이름으로 모일때’ (마태복음 18:20),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합니다 (질문 7.10 참조). 이 모임은 ‘사람(들)’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당신께서 이 모임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꼐서 주관하시고 (고린도전서 12:5), 성령님께서 ‘그의 뜻대로 (고린도전서 12:11)’ 인도하시고, 운영하시고, 개개인에게 역할분담을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형제들에게는 [1] 찬송가를 선곡하고, 대표 기도를 하고, 덕을 세우기 위한 설교를 할 자유가 주어져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14:26-33). [1] 성경은 자매들이 교회 모임에서 침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4:34

7.13 교회 모임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 설교해야하나요?
‘말씀 사역’이란 (사도행전 6:4),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자들에게 가르치고 서교함으로써 봉사(service)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봉사는 ‘선생이나 목자 등’과 같은 영적 은사를 받은 형제들에 의하여 행해져야 합니다. 이 말씀 사역은 예언적인 성향이 있는데, 여기서 ‘예언적’이라 함은 하나님이 우리들이 현재 처한 상황이나 현재 시점에 우리들의 양심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교회 안에서 ‘독보적으로 그리고 혼자서’ 사역을 하는 경우를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안디옥 교회의 경우, 독보적이고 홀로 사역을 하는 ‘목사, 목자, 성직자’는 찾아 볼 수 없으며, 사도행전 13장 1절에서 묘사하는 것과 같이 다수의 ‘선지자들, 선생들’이 함께 사역을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교인들에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당부합니다 (고린도전서 14:26).

7.14 교회 모임에서, 은사와 직책은 무엇인가요?
은사는 영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예: 가르침의 은사, 전도의 은사 등). 직책이란 집사나 장로등과 같이 주어진 의무나 책무를 말합니다. 은사는 교회 전체 (전 세계/우주적인 교회)를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기에, 예를들어 가르침의 은사를 가진 형제(들)은 다른 도시나 나라에서도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11-12). 하지만 디도서 1장 5절에서 ‘각 성/도시에 장로들을 세우려’라고 하듯이, 직책은 보통 해당 지역 교회에 국한됩니다.

7.15 교회 모임에서, 장로나 목사를 임명해야 하나요?
신약성경을 보면, 장로들은 항상 사도들에게 임명되거나 (사도행전 14:23), 사도의 명령을 전달했던 사도의 대리인들에 의하여 임명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디도서 1:5). 예수님을 직접 보았어야 ‘사도’가 될 수 있었듯이 (사도행전 1:21-22; 고린도전서 15:18과 관련하여 사도행전 9:4-6), 오늘날에는 사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사도들의 대리인들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리고 성경적으로 말하면, 오늘날 장로들은 더 이상 임명 될 수 없습니다. 장로들의 소위 ‘자격요건’이 디모데전서 3장 1-7절에 언급되어 있듯이, 물론 오늘날에도 장로들의 소양을 갖춘 형제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언급된 장로의 오건을 살펴보면, 오늘날 이러한 요건을 갖추기란 쉽지 않을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요건을 갖춘 형제들이라면 (과거 존재했던) 장로들의 사역을 오늘날 수행할 수 있으며, 또 다른 형제/자매들은 이 장로의 소양을 갖추고 사역을 하는 형제들의 권위를 존중해야 합니다.

7.16 신약 성경에서, 은사의 종류는 어떠한 것들이 있나요?
에배소서 4장을 보면,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은사의 주요 5 종류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1. 사도
주님을 직접 본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1:22; 9:4-5).
2. 선지자
예언하는 믿는자들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었던 이들을 가리킵니다.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들에게 직접 계시되었습니다 (예베소서 3:5 참조). 오늘날에는, 신/구약 성경이 완성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예언의 사역은 존재합니다. 한마디로, 현재 처한 상황이나 시점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설파하는 사역을 말합니다. 이 예언의 사역에서 주시해야 할 점은, 이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과 어긋날 수 없으며, 이 예언의 모든 것은 결국 교회 (즉 믿는 모든이)에게 덕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사도행전 21장 9절을 보면 예언의 사역을 여성이 하는 경우도 있지만, 공공 장소나 교회모임의 경우에는 여성이 사역을 하는 경우를 볼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4:34).
3. 전도자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메세지를 전하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또 교회로 인도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전도자의 좋은 예로, ‘전도자 빌립’ (사도행전 21:8)이 있으며 사도행전 8장은 빌립이 전도자로서 어떠한 활동을 하는지 보여줍니다.
4. 목자
말 그대로 양 무리를 이끌며, 양 하나 하나 즉 교회 안의 개인들에게 관심을 갖고 보살펴주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직업 목자, 즉 ‘목사’제도에 의해 마치 목자가 해당 교회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으로 잘못 인식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결코 성경에서 말하는 목자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목자’가 언급될 때는 항상 복수로 사용된다는 것은 한 교회안에서 다수의 목자가 존재했음을 암시니다 (에배소서 4:11).
5. 선생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도록 그 진리는 설명해주고 가리쳐줄 수 있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누가복음 24:17,32).
위에 언급된 5가지의 은사 이외에, 성경은 더 많은 은사들을 언급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로마서 12장).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에 따라 주시는 은사들의 종류를, 성경의 몇 구절이나 장에 언급된 종류들로 제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7.17a 성경에 나오는 방언이나 치유의 은사 같은 ‘기적같은 은사’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당시에 이러한 은사들이 주어진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사를 주신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불신자들을 전도를 위해서 일까요? 아니면 은사 받은 이의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해서, 아니면 질병에의한 육체적인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서 일까요? 하나님이 당시에 이러한 특별한 은사들을 보여준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완전히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한마디로 교회라는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을 알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드디어 율법의 시대는 끝이 났으며,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교회는 만들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가 처음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첫날, 즉 오순절날 (Pentecost) 에 사도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었습니다. 여기서 방언이란, 당시 현존했던 다른 나라/지방의 언어를 학습하지 않고 바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아무런 학습 없이 다른 언어를 즉시 사용하는 능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명백합니다. 참고로, 다른 방언의 은사는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증표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4:21). 다른 예로, ‘치유’의 은사라는 것이 존재했습니다 (예: 사도행전 3장). 이 은사의 궁극적인 이유는, 병든자들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함이 아니고 불신자들을 믿게 하기 위한 기적의 증표로 사용하기 위함이였습니다.

7.17b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이러한 은사들이 존재할까요?
이러한 기적과 같은 은사나 증표들은, 하나님이 교회를 만들기 시작한 초창기 때에 사용되기 위해서 였습니다 (히브리서 2:3-4). 한마디로 ‘지금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라는 증거로 사용된 것이 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은 실로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고 계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기적들을 행할 수 있으며 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은사의 개념과는 별개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방언의 은사’의 경우는 어떨까요? 먼저 이 글을 읽으시는 분에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은 다른 나라의 언어를 전혀 배우지 않고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2장에서 묘사하는 ‘방언의 은사’입니다. 이러한 방언의 은사를 구사한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들은 동시에 고린도전서 14장의 말씀들을 동시에 지켜야 할 것입니다. 예를들어 고린도전서 14장 13절과 27절에 언급하듯이, 이들이 구사하는 방언들이 통역이 되고 있나요? 또 22절이 언급하듯, 이들은 방언을 불신자들에 대한 표적으로 사용하고 있나요? 그리고 여성들은 34절에서 말씀하듯, 잠잠히 침묵하고 있나요? 신약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면, 우리는 당연히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은사가 그자체로서 떠받아들여지는 ‘거짓된 은사’인지 성경말씀을 통해 분별해야 할 것 입니다.

7.18 ‘교회의 몰락’과 같은 표현처럼, 대중들의 교회에대한 부정적인 반응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순절 부터 하나님이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 교회는 오늘날에 와서는 그 모습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은 서로 각기 다른 그룹/단체를 만들어 그 안에 자신들을 소속 시켰습니다. 과거에 단순히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으로 살아갔던 모습과는 달리, 오늘날 많은 크리스챤들이 이처럼 ‘단체’에 ‘가입’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베소서 4장 3절은 그리스도의 몸된 참된 교회는 ‘이미’ 하나님이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의 몰락’이란, 이 세상에서 교회의 ‘외적인’ 삶이 옯바르게 증거되지 않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참된 교회’는 몰락하거나 더럽혀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의 ‘외적인 삶’을 볼 때, 교회에 많은 죄악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의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역/행정에 관련된 악:
교회내 독보적 1인 사역
교리적 악:
‘예수님은 죄성이 없고 지은 죄 또한 없음’,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격임’, ‘동시에 예수님은 생물학적으로 볼 때 우리와 같은 완전한 인간임’을 부인. 구원에 관한 잘못된 교리. 혹은 ‘성서 (성경책) 는 성령에의하여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떠한 오류도 있을 수 없음’을 부인 (본 서 8장 참조). 기타 성경 말씀에 반하는 교리.
‘도덕적인 악’:
크리스챤들의 일상 및 교회 생활에서 성경에 반하는 행위들이 점점 더 허용되고 있음.
교회와 관련된 이러한 ‘악’의 영향은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이러한 종류의 악을 표면적으로는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지속적으로 자신 개인생활과 교회생활에 허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7.19 이러한 ‘교회 몰락’의 시대에서, 교회가 연합 (the unity) 을 통하여 증거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 인간들이, 교회에 관한 그리 많은 것들을 망쳐왔을 까요? 우선 대답은 ‘네,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생활의 성경적인 원리와 원칙을 실행하기란 정말 불가능해, 그냥 포기할 수 밖에 없겠지’라고 결론을 내려야 할까요? 우리가 인위적으로 교회 ‘조직/단체’를 설립하는 것과 같은 비성경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경이 보여주는’ 교회 생활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즉 성경적인 교회 생활이란 오직 우리 주 예수님 주위로 모이고 (마태복음 18:20),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부분들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요,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당신을, 예수님을 진정 주로 섬기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께 인도되어 이들을 진정 만난다면, 그들과 만나서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 안에서 성경적인 교회생활을 지속적으로 해 나아가십시요. 꼭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님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의 교회를 이루어 놓으셨으며 (물론 계속해서 확장해 나아가시고 있으시지만), 이런 의미에서 우리 예수님의 교회는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단지, 우리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그의 그의 교회를 인식하고 실천해 나아가는 것 뿐입니다.

7.20 예수님을 기억하는 성찬식은 누가 참여할 수 있나요?
성찬식은 자격이 박탈되지 않은 ‘모든’ 크리스챤들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모든 크리스챤들이 참여해야하는 이유는, 성찬식이란 주님의 몸된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17). 그렇다면 앞에서 ‘자격이 박탈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을까요? 어떻게 이러한 특권인 성찬식에 참여할 권리가 박탈될 수 있을까요? 성경말씀에서는 다음 3가지의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도덕적인 악:
고린도전서 5장을 보면, 한 크리스챤이 그의 부도덕적인 행실로 인하여 성찬식 참여에서 제외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리적인 악: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 이외의 교리를 전파하는 자는, 집으로 불러들이지도 말라고 경고합니다 (요한이서 9-11절). 이가 크리스챤이라고 해도, 집으로 불러들이지도 말라고 한 이와 함께 성찬을 하며 예수님을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교리적인 악은, 갈라서 5장 9절에서 경고하듯이 반죽 전체에 악 영향을 미치는 미량의 누룩과 같습니다.
악(evil)과 직/간접적 관계에 있는 경우:
앞서 언급한 요한2서 9-11절에서는 이러한 이단적 교리를 전파하는 이들에게 인사하는 것 만으로도 ‘그들의 악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크리스챤인 자신이 우상을 실제로 숭배하지 않더라도, 그 우상의 성전에 방문하는 자들은 ‘그 귀신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경고하는 고린도전서 10:19-22와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3 과 요한계시록 2:14 을 더불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7.21 지역 교회 (모임) 들은 서로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나요?
한 지역의 모임 (지역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의 한 부분입니다 (고린도전서 1:2). 우리 인간의 몸을 이루는 각 부분들도,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하나가 되어 주어진 기능들을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지역 모임들도 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몸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역 모임들이 아닌 크리스챤 개개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개개인들은 다시 지역 모임/교회들를 이루는 것일 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개념의 ‘하나님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한’ 몸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는 지역모임들은 하나의 몸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결론이 다시 한번 증명됩니다.
따라서 지역 교회들은 서로 독립된 개체들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하나의 ‘하나님 교회’를 집합적으로 표현/재현하는 하나의 몸 입니다 (고린도전서 10;17; 12:27; 질문 7.9 참조).
지역 교회가 성도들을 대상으로 교육/훈육을 하거나 새 산자를 받아들여 성찬에 참여시키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한 지역교회에서 이러한 교육/훈육 및 성찬 참여에 관련된 결정이 내려진 경우, 이 지역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이 결정에 종속됩니다 (마태복음 18:18 –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특정한 지시를 내릴 때, 이 지시가 다른 모든 지역에도 적용이 된다는 것을 재차 당부합니다 (고린도전서 1:2; 4:17; 11:16).
7.22 교회 모임에 있어서, 훈육 (discipline) 이란 무엇인가요?
훈육의 목적은 성경 말씀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성도들이 말씀 앞에 다시 바로 설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훈육의 방법은 상황에 따라서 다르며, 다음과 같은 훈육 방법의 예가 성경에서 언급됩니다:
- 어떤 형제/자매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아주기 (갈라디아서 6:1-2)
- 무질서한 형제/자매을 훈계하고 (데살로니가전서 5:14), 혹은 멀리하고 (데살로니가후서 3:6), 경우에 따라서는 지목하여 교제를 중단합니다 (3:14). 그러나 이(들)을 원수처럼 대하는 것이 아닌 형제처럼 타일러야 합니다 (3:15).
- 공적으로 (즉,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징계합니다 (디모데전서 5:20; 갈라디아서 2:11-14)
- 이단자는 경고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이(들)과 교제/관계를 끊으며 (디도서 3:10-11), 비성경적인 교리로 교회내에 분열을 조장하는 이들을 경계하고 멀리합니다 (로마서 16:17).
- 교회 내에 비성경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이들을 막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1:3-4; 디도서 1:10-11).
- 죄에 빠진 (즉, 죄를 현재 짓고 있는) 형제/자매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혹은 둘 이상이 가서 권고합니다 (마태복음18:15-17 참조).
- 고린도전서 5장에 언급된 사악/음란한 이들과 교제를 끊고 멀리 합니다. 이는 교회 모임의 훈육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수준의 훈육에 해당됩니다, 해당 교회 모임은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써 ‘모두 반성하며’ 훈육을 해야하며, 훈육 후에도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이러한 상황을 맡기고 의지해야 합니다.

7.23 ‘교파/종파 (sect)’란 무엇을 뜻하나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여러 종교가 혼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종교 집단이 자신보다 더 크고 공식적인 종교 집단에 속하지 않았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때, 세상은 이 소수의 종교 집단은 종종 ‘교파/종파 (sect)’로 부릅니다. 기독교도 초기에는 소수 집단이였으므로, 하나의 (이단) 교파나 종파로 분류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4:14 – 다비역; 28:22). 교파 (sect) 라는 단어의 어원은, 한 지도자의 교리/가르침이나 이념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학파나 집단을 가리키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조금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특정 교리로 부터 생겨난 학파/집단에 사람들이 가입을 하면서 부터 ‘교파 (sect)’의 개념이 생겨난 것입니다. 성경 속에 있는 좋은 예가 바로 고린도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적했던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들 중의 하나는,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몇몇 특정 지도자들을 위주로 분열되어 갔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1-13; 3:3-5). 바울은 이러한 분열의 영에 이끌려 교파들을 형성하는 것은 위함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11:18-19).
우리 크리스챤들을 이러한 교파로 전락시키는 요인는 무엇일까요? 주요 근본 요인으로 다음 2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 공식적인 조직이나 단체를 설립합니다. 그 결과, 그 조직/단체에 가입 후에야 그곳의 형제/자매들과 교제가 가능합니다.
- 교체를 희망하는 외부 형제/자매들에게 성경에 나와있지 않은 조건들을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언급된 교리나 도덕적 행실이 아닌, 옷차림과 같이 성경에 나와있지 않은 조건들을 요구합니다.

7.24 우리는 어떠한 교파에 속하나요?
만일, 지금 내가 속한 모임이 특정 교파나 단체로 등록되어 있거나, 혹은 특정 교파나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면 가능한 빨리 그 모임에서 발을 끊는 것이 좋습니다. 초기 크리스챤들은 그들 교회에 특정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며,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름을 사용해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시 크리스챤들은 이미 그 지역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로 알려졌기 때문에, 이들은 특정 교회이름이 아니라 단순히 ‘크리스챤’으로 불렸습니다. 우리는 크리스챤으로써,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되는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해야합니다.

7.25 내가 속한 교회 (모임) 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 (크리스챤) 들은 어떻게 대해야하나요?
나와 함께 모이지 않고 교제하지 않더라고, 모든 크리스챤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이며 또 자매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함께 떡을 떼며 예수님을 같이 기억하지 못하고 또 현실적으로 교제가 불가능하더라도, 우리는 그들 모두를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사랑을 그들에게 표현해야 할까요? 그들에게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고 함께 찾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이들이 하나님 앞에 잘 세워지고 (베드로전서 1:5) 또 그들의 믿음이 지속해서 성장할 수 있도록 형제애를 가지고 도와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종종 하나님 말씀, 즉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